조선시대 분청사기 기법, 귀얄기법과 덤벙기법

일상다반사

조선시대 분청사기 기법, 귀얄기법과 덤벙기법

천군양♡ 2022. 2. 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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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희가 준비한 발표는 조선시대 분청사기 기법 중 귀얄기법과 덤벙기법 위주로 준비했습니다.
발표를 들어가기 전에, 발표할 내용을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엔 배경, 과정, 결과를 중심으로 따지듯이, 분청사기 기법에 대해 알기 전에, 분청사기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분청사기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원인, 그리고 발달과정, 쇠퇴까지 간단히 설명 드리고, 분청사기의 기법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자, 그럼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분청사기는 회청색 그릇에 흰 흙을 입혀 다양하게 장식한 도자기로, 그 명칭은 미술학자이자 고고학자인 고유섭 선생이 분장회청사기라고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쇠퇴한 상감청자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전기 도자의 한 주류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화려한 귀족문화를 즐겼던 고려가 몽고의 침략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토태의 질과 문양, 형태의 곡선미와 유약, 소성방법 등이 조금씩 변화되고 고려청자의 귀족적인 깔끔한 기풍이 흐트러지면서 이물질이 섞인 토태는 거칠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에 비해 생동감과 자유분방한 특징을 가졌는데요. 어느 도자기보다 한국적인 미감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와 고려 말의 상감청자는 눈으로만 봐서는 구분이 어렵지만 국가에 바치는 조선초기에 분청사기가 세금의 일종으로 곡식이나 돈이 아닌 도자기로 대신 납세했기 때문에 관사명이 수록된 대접과 접시들을 분청사기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분청사기는 20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발전을 했구요. 태동기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토태의 질과 문양, 형태의 곡선미와 유양, 소성방법 등의 변화로 고려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발전하게 됐고 조선 초 발생기에 분청사기에 관사명을 붙인 ‘관사명 분청사기’가 등장하여 공물로 걷기 시작했고,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이 때 7가지 기법이 발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쇠퇴기 때는 7가지 기법 중에 귀얄기법과 분장분청사기를 끝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쇠퇴기에 대해선 뒤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구요..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분청사기 기법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이 고려 말 퇴화한 청자에서 변모했습니다. 무늬를 면이나 선으로 파고 백토를 박아 넣는 상감기법은 15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이용되었고 고려 청자 상감 기법의 연속이라 볼 수 있습니다. 후일에 박지기법의 발생에 영향을 주고, 주로 모란, 연꽃, 용, 버드나무, 물고기와 같은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무늬를 새긴 도장으로 반복해서 찍은 후 찍힌 자리에 백토를 넣어 무늬를 만드는 인화기법(분청사기인화문태호)은 15세기 중엽에 가장 세련된 기법이었습니다. 처음엔 듬성듬성하다가 꽉차게 문양을 채웁니다. 그 다음, 백토로 분장하고 시문하려는 문양을 가늘게 선각하여 음각부분에 토태의 색이 드러나게 한 음각기법이구요.(분청사기 음각 어문 편병) 백토로 분장하고 문양을 음각한 다음 배경을 긁어내는 박지기법(분청사기 모란넝쿨 무늬 병)은 세종 때 나타났고, 백토를 분장한 후 붓을 이용하여 철분이 많은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철화기법(분청사기 연꽃 물고기 무늬 병)은 1450년 이후 쇠퇴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문양이 생략되는 귀얄기법과 덤벙기법에서 점차 기물이 표현되는 문양은 적어지고 백토 분장되는 면적이 넓어져 갑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귀얄기법과 덤벙기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귀얄기법은 기물 표면에 백토를 분장하는 것으로 거친 붓이나 싸리붓을 이용하여 분장시키므로 붓자국의 효과를 그대로 표현한 장식기법인데요. 귀얄작업은 기면 전체에 불규칙하게 귀얄한 것과, 일부에 토태가 보이도록 귀얄효과를 나타낸 것도 있는데 귀얄한 후에 조화기법, 박지기법, 철화기법까지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귀얄기법은 거친 붓자국이 나타나서 투박해져서 소박하지만 이 때 보이는 귀얄자국에서 빠르고 힘찬 운동감을 느낄 수 있고, 자연스러운 회화적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귀얄기법의 이용한 분청사기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도자기에 붓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확인하실 수 잇습니다.

그 다음은 덤벙기법인데요. 정형작업이 완료된 기물을 건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묽지 않은 백토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서 백토를 분장하는 기법입니다. 기물이 백토로 도포되는 게 귀얄문과 같지만 백토가 기물에 깔끔하고 표면이 차분합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저리에서 백토가 묻지 않고 흘러내린 곳만 있어서 추상적인데 백토가 두껍게 씌어지면 표면이 거의 백자와 같을 수도 있지요.
다음은 덤벙기법을 이용한 덤벙문 제기 입니다…….




그러나 15세기 말,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된 이후 국가에서 필요한 그릇을 백자로 제작하면서 지방 분청사기 가마들은 점차 지방 관청과 일반 백성을 위한 도자기를 만들게 되고 16세기 후반, 사림이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성리학이 발달하고 백자가 실생활이 되면서 분청사기는 백자에 의해 흡수됩니다. 이 때문에 분청사기의 질은 떨어진 반면 백자의 생산량은 늘었고 임진왜란의 발생으로 인해 수많은 우리나라 도공들이 잡혀가서 일본의 도자문화가 시작되었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에 유행했던 귀얄 분청사기와 덤벙 분청사기를 끝으로 분청사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자 그럼 지금까지 발표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냥 읽으면 됌)

그럼 여기서 발표를 마치고 이제부터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
더 이상 질문이 없으시면 이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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